다름과 그름

아마도 처음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독서실 고학생 유피님의 블로그에 자취를 남깁니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오히려 축복 아닌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얻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극연왕의 오라버니 모씨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던 저 대사가 생각나는군요.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극연왕의 오라버니 모씨가 생각했던 것처럼 큰 사랑과 포용만이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름을 부정하는 태도의 극단에 놓여 있는 비아스 마케로우를 생각해볼까요.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나가를 멸절시키라고 부르짖었던 비아스의 모습은 분명히 다름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극연왕의 오라버니 모씨처럼 하해와 같은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양피지와 도깨비지로 대표되는 비유가 생각나는군요.

나가들이 짐승을 도축해서 양피지를 만든다고 해서 도깨비가 나가를 증오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도깨비들은 도깨비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깨비지를 만들어서 사용할 뿐이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도깨비들이 나무를 베어 도깨비지를 만드는 점은 나가들이 도깨비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깨비는 다름을 긍정할 줄 알고, 나가는 다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도깨비가 다름을 긍정한다고 해서 그들이 직접 양피지를 만들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첨언-
다름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긍정해야 합니다. 도깨비는 자신과 다른 나가들의 풍습을 긍정하지만, 그만큼이나 피를 싫어하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하지만 도축을 하는 다른 종족을 비난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뒤집어서 말하면, 먼저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다름을 긍정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겠지요.



전에 제가 [사회윤리의 제문제] 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온라인 게임과 사이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발표를 하면서 이런 화두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이트의 약관에 반드시 동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커뮤니티의 규칙에 순응하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막말로 변태 사이트에 가입을 해놓고 그 사이트가 변태 사이트라고 욕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당시 선생님의 질문이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기현씨, 어째서 변태가 막말입니까?"

... 이 질문이야말로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로 최상급일 겁니다.

-첨언2-
변태로서의 자신을 긍정할 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



제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정확히 구별해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가 만든 문장입니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뜻은 다릅니다. 따라서 "다르다"를 사용할 상황에서 "틀리다"를 사용하는 것은 틀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그 판단을 적용할 대상은 자기 자신에 한정지어야 한다... 는 게 제 지론입니다. :) 물론 제가 남을 욕할 때가 많지요. 하지만 제게 욕먹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은 뭔가 자기 판단을 나한테 강요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사람 아닌 것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습니다. (...)
by hislove 2005. 10. 26. 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