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글을 싫어하는 이유.

Double Bs 카테고리의 세 번째 대상작으로 다운군의 글을 또 도마 위에 올려둡니다.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하 존칭은 생략합니다.

0. 들어가기 전에

이번 Double B의 대상은, 지난 번 예고와는 달리 무진(霧津)을 배경으로 하는 유명한 소설 무진기행(霧津奇行)에서 모티프를 따온 글 『기행』이다.

내가 다운군의 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그의 블로그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고, 이 Double B의 첫 스타트를 끊었던 글도 그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번 글은 내가 접하는 그의 두 번째 완결된 이야기로, 솔직히 이야기해서 첫 번째 글인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 글을 대상으로 삼았는가...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좀 있어서 라고 대답해야겠지.

이번 비평문은 20세기 초 러시아 구조주의 작가관에 입각한 이야기가 주류가 될 듯 하다. 그는 스토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여전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완성된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고 있기에(물론 내가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스토리의 자체 정합성에 대한 기준은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지만, 보편적인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그의 스토리라인은 "뛰어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충족한다), 논의의 중점은 다분히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에 대한 것이 될 듯 하다.

1. 무진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아발론 이야기

그는 이 글에서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사건과 유사한 비화를 끌어와서 서로 상응하는 댓구를 만들었다.

무진엔 명산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더왕이 떠난 곳- 그래, 여긴 바로 아발론으로 가는 길. 여기가 바로 그곳인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따온 첫 문장은 이 특이한 글의 도입부로서 매우 적절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결말부와 강하게 결합되어 김승옥의 원전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댓구들이 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주인공은 아서 팬드래건과 대응하며, 만년필과 엑스칼리버도 같은 대응 관계를 유지하는 식이다. 유명한 비사에 기대어 또 하나의 비사를 만들어내는 구성 방법은 매우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2. 그러나 과거에 비사였으며, 미래에 다시 올 비사라 할지라도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것은 지금 만들어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여러 분들이 댓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시도 자체는 매우 적절했으나 과거와 미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서 팬드래건의 비사와 작중 화자가 겪은 사건 간의 묘사 비중이 너무 애매하다. 개인적인 느낌에 기대어 말한다면, 아서 팬드래건의 비사에 대한 묘사를 줄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기사담에 대한 그의 취향은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취향 탓인지 기사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좀더 장황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사담이 "주"가 아닌 이런 종류의 글에서는 조금 절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미래의 연인에 대한 묘사가 좀더 충실해질 필요성도 있다. 순전히 원고지 육십 매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에 그런 제한사항이 없었다면 이 글에서는 그저 앞부분의 묘사를 조금 줄이고 중간의 어색한 대화들을 만져주는 정도로 손보는 것이 딱 좋다고 생각한다.

3. 그런데, 어째서 교회인가?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

다운군 스스로도 준비한 장치를 다 써먹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거니와, 어설픈 비평가인 내가 보기에도 석연치 않은 설정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우선, 어째서 교회인가?

만남의 장소가 교회여야 할 개연성이 너무 없다. 아니,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교를 성채로, 학생들을 기사로 묘사한다면 역시 역사(!)가 만들어지는 장소는 교회보다 학교가 적절하지 않을까. 화자의 연인이 이웃 학교 학생일 수도 있는 거고.

우리는 나중에, 가까운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웃으면서 만나자. 그때는 더 무르익은 과실처럼 되어있길 빌어.

천만에, 아직도 너 농담은 서툴구나. 아직도 덜 익은 모양이네?


매우 적절한 댓구. 하지만 이 댓구를 단 한번에 발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댓구를 좀더 도드라지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 . . . . . . . . .
천만에, 아직도 너 농담은 서툴구나. 아직도 덜 익은 모양이네?

꼭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구조주의 문학 이론에서는 저러한 "문장 외적인 방법"으로 문장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문학 기법으로 간주하며, 때로는 스토리보다도 더욱 문학적인 기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다운군의 글에서는 처음 접하는 듯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자동기술법 서술 자체는 매우 적절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언과 의식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흐름이 끊어지는지 이어지는지조차 애매한 상태인 것은 문제가 있다. 줄바꿈을 적절히 해 주는 것만으로 많은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덤으로, 매우 합법적으로 원고지 매수를 늘리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도입 부분의 인용문도 독립된 문단으로 줄바꿈 정렬하는 것이 가독성과 함께 문학적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와 같이.

무진엔 명산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라고 무진 출신의 누군가가 말했던 듯 하다.

그가 표현했던 여귀의 한숨과 같은 짙은 안개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아니, 힘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그 여귀의 한숨과 같은 짙은 안개였으니까.


그 외에도 간간히 어색한 문장들이 보이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할만한 문제는 아니다.

4. 삽화 부재에 대한 큰 아쉬움

항상 다운군이 토로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그의 글은 대부분 적절한 삽화가 곁들여져 있다면 완성도가 배가될 수 있는 성질을 띄고 있다. 이 글 기행에서도 그 부분의 아쉬움이 많다. 이건 작가인 다운군 스스로가 어디에 어떤 삽화가 삽입되면 좋을지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로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5. 정리하면서

못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건 비평자로서의 내 필력이 부족한 탓에 지금은 "오해 없이" 뜻을 전달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접어둔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 이 글은 奇行인가? 아니면 騎行인가?

by hislove 2005. 7. 19. 0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