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기사담 한컷극장-Nevergreen

약속한 대로, 다운군의 Nevergreen에 대한 Double B로 이 카테고리의 테이프를 끊습니다. 이하 존칭은 완벽하게 생략합니다.

-1.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겹게 외워 온 소설의 3요소-주제, 구성, 문체-와 그 구성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 이론은 지금 와서는 진부한 맛이 없지 않지만, 사실 사실주의 문학에서 그만큼 중요한 포인트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작가의 문체를 통해 어떠한 구성을 이루어 완성되며, 그 이야기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는 건 그야말로 동어반복적인 사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진부한 이야기가 오늘 이 글의 핵심 내용이니까.

0. 들어가며

이 짧은 글은 필자 다운군이 구상한 거대한 이야기 <은기사담>의 일부가 될, 혹은 이면 설정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르는 한 장면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은기사담> 전체의 주제와 맞물려 설명해야 하는 난제이고,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제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 하다.

이 글은 또한 세 사람에 대한 설정을 밝히기에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어떤 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인물관계에 대해 독자들에게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고, 일어난 사건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플롯도 최대한 단순화되어 있다. 이것은 구성의 측면이다.

하지만 문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조금 보인다. 구성의 맛을 100% 살리지 못한다고나 할까.

즉, 이 글에서는 구성과 문체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말해보려고 한다. 특히 구성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하고 문체에 대해서는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정도가 되겠다.

1. 카라독이 이졸데를 먹어서 트리스트람이 분노하다.

전후관계 다 빼고 이 글에서 나타나는 사건을 한 줄로 정리하면 저렇게 된다.

트리스트람 라이오네스 로엔그린과 마크 카라독 브리프브라는 둘 다 이졸데라는 여인을 사랑했는데 이졸데가 트리스트람을 선택하고, 결과적으로 마크는 질투에 눈이 멀어버렸다...

그리고 마크는 뱀파이어, 트리스트람은 라이컨스로프. 이졸데는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이 바닥(?)의 통념상 뱀파이어는 교활하며 영민하고, 라이컨스로프는 열정적이며 저돌적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정도의 상황이 제시되었다면 지금 벌어진 사건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게 된다. 구성의 측면에서 개연성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최소한 사실주의 비평에서는)개연성이 결여된 것은 소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Nevergreen을 포함해서 몇 편 공개된 <은기사담>의 세계관은 여러 가지 설화 혹은 창작물에서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다지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 점에서, 나는 이 글을 포함한 다운군의 글을 높이 평가한다.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철저하게 현실세계와 유리되어 있는 환상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된다. 환상세계의 세계관은 100%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현실세계나 다른 튼튼한(?) 환상세계에서 설정을 차용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뭐야, 종족설정은 반지의 제왕이잖아, 어라 경제 시스템은 D&D에서 베꼈네' 따위의 비난은 무의미하다. 작가에 의해 조립된 세계는 그 자체로서 정합성을 가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물론 '뭐야, 노동자 하루 일당이 은편 한 닢이라면서 도로 사용료가 은편 열 닢이야? 엉터리잖아!'는 매우 정당한 비판이다.)

이영도는 자신의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화폐 단위는 환타지 세계에서 쓰이는 '금/은/동편'을 사용하면서 도량형은 엉뚱하게도 미터법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국 그의 손 끝에서 완성된 세계는 자체로서 상당한 완성도를 보였다. 즉 남의 재료를 이용해서 튼튼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2. 문체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이야기와 구성에서는 딱히 흠 잡을 부분이 보이지 않지만, 문체로 넘어오면 아쉬운 면이 좀 보인다.

우선, 일본 소설 냄새가 지나치게 난다.

특히 몇몇 인물들의 대사는, 좀 과장을 덧붙이자면 일본말을 번역해 놓은 듯한 문체로 되어 있다.

"무슨 짓을 한거냐, 마크Mark, 아니. 카라독Caradoc!"

이 서술에서 트리스트람은 마크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성으로 부르는 타인이며 경칭을 생략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상대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렇게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호칭을 가르는 나라는 최소한 한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일본, 중국, 러시아 중에서 일본밖에 없다. 판단 근거가 될 만큼 그 나라 말을 접해본 나라들이 저 정도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들은 생략했다.

"なにしてったんだ, マークMark, いいえ, カラドックCaradoc!"

내 상식의 범위에서 이런 식의 문장을 실생활에서 사용할 만한 나라라면 일본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트리스트람의 저 발언에 담긴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어떤 고유명사에 '등가가 아닌' 로마 자 표기를 병기하는 서술 방법은, 여기서는 나스 키노코의 스크립트(그는 요미가나를 사용할 자리에 로마 자 표기를 넣는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를 연상하게 하는 면이 있다. 꼭 필요한 포인트에서 한 두번 사용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효과를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글 전체에서 그걸 남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도치법을 남용하고 있다. 도치법은 묘사의 완급을 조절하는 데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체적인 기법이지만, 도치법을 남용할 경우 글이 지저분해지는 단점이 있다.

'그녀'라는 말 역시 일본어의 彼女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우리말에는 '그녀'라는 말이 없었다. 남녀 공히 대명사 '그'로 받는 게 맞다.

그 외에, 몇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긴 하지만, 일일히 다 이야기하기는 좀 지나치게 사소한 것들이라서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3. 맺으며

문체 부분에 가서 좀 끔찍(!)할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짚어서 다운군에게 좀 많이 미안하다. 하지만 Nevergreen은 전체적으로는 내 맘에 드는 글이다. 말하자면, 스토리가 좋은데 CG가 좀 떨어지는 게임이라는 느낌일까.

그리고 문체 부분에서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요새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편에 속한다. 다만 다운군이라면 좀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좀 심하게 말했으니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론은, 역시 난 다운군의 다음 글을 꽤나 기대하고 있다.
by hislove 2005. 5. 4.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