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마 꽤 많은 분들이 보셨을 법한, 재탕에 삼탕을 거듭하고 있는 글입니다. 제가 몇 번인가 썼었던 Double B의 기반이 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워낙 오래전에 작성한 글이라서 글이 조금 껄껄할 수는 있지만, 그런 대로 마음에 드는 글이라서 지금은 수정할 생각은 별로 없네요. 나중에 좀 더 나은 형식주의 관련 글을 쓰게 되면 지울지도 모르겠군요.



0. 들어가며 - 문학과 현실의 관계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학이란 개연성 있는 무언가를 언어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는 한다. 이 대답은 ‘문학의 수단은 언어’라는 것 외에는 문학의 ‘내용-개연성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만 포함하고 있을 뿐, ‘어떻게?’에 대한 고찰은 빠져 있다. 이전까지의 문학 전통에서 ‘어떻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작가는 독자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었고, 독자는 그저 작가가 제시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어떻게’ 작품을 쓰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가질 수도 없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문학’이 그저 ‘언어를 통해 개연성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언어로 작성된 개연성 있는 무언가’는 모두 ‘문학’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법원의 판결문이나 항해 일지, 또는 열 살 먹은 사촌동생의 일기장을 모두 문학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전술한 것들을 우리는 대개는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에는 ‘언어’라는 수단과 ‘개연성’이라는 내용 외의 제 3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20세기 초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것을 ‘기법’이라고 말한다. 즉, 현실을 문학으로 만드는 요소로서 그들은 ‘기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법’, 혹은 ‘기교’는 무엇일까?

1. 문학이란, ‘기교의 총화’이다.
전술했듯이, 언어로 씌어진 것을 모두 문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문학이 문학이게 하는 것’은 언어라는 수단만이 아니다. 빅또르 쉬끌롭스끼(Victor Shklovsky)는 문학을 ‘그것에 사용된 모든 스타일 상의 기교의 총화’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극단적인 정의는 ‘문학이 문학이게 하는 것’은 내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사용된 기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형식주의의 입장을 극명히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 삶이 당신을 속이더라도 슬픔의 때가 지나면 기쁨의 때가 올 테니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ii) 삶이 당신을 속이더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때가 지나가면 / 기쁨의 때가 오리니.
(알렉산드르 뿌쉬낀 - ‘삶이 당신을 속이더라도’ 중)

i)과 ii)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ii)에는 시적 기법이 사용되어 i)과는 달리 ‘문학’으로 인정된다.

‘기법’에 주목하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을 언어의 독특한 사용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독특함’은 실용적 언어에서 동떨어진, 무언가 ‘왜곡된’ 언어 사용으로 간주되었다. 실용적 언어가 일상적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된다면, 문학적 언어는 그저 우리가 사물을 일상과는 다르게 보도록 해 줄 뿐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시’에나 적용될 뿐, ‘산문’에는 단순히 적용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산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실용적 언어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피해가기 위해서 당시 학자들은 ‘문학성’에 대해 좀더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문학이 실용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은 ‘구성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시를 가리켜 ‘언어를 순전히 문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상징주의자들이 시를 ‘무한한 것’, 혹은 추상적인 어떤 실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 쉬끌롭스끼를 비롯한 형식주의자들은 시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시를 ‘시이게’ 하는 작가의 여러 기법을 밝혀내고자 했다.

2. 문학이란 ‘낯설게 하기’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똑같이 자명종 소리에 맞춰서, 혹은 가족들이 깨워서 잠에서 깨어 학교에 와서 똑같은 시간표에 맞추어 똑같은 강의를 듣는다. 똑같은 필통에서 똑같은 펜을 꺼내어 필기를 하며, 똑같은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다. 일상은 이렇게 ‘자동적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만나는 사물들은 일상적이지 않다. 무언가 낯설다. <안나 까레니나>에서 안나는 어느 날 남편 까레닌의 귀가 매우 못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불노리>에서 서정적 자아는 저녁놀이 질 무렵 강물을 바라보며 ‘괴상한 웃음’을 느낀다. 일상적인 인식대로라면 매일 보는 남편의 귀가 못생겼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저녁놀이 질 무렵의 강물을 바라본다고 해서 괴상한 웃음이라는 인식을 갖지는 못했으리라.
쉬끌롭스끼는 이러한 것을 ‘낯설게 하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낯설게 하는’ 감각작용보다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가져오는 ‘기교’의 본질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3. 네러티브 - 스토리(fabula)와 플롯(sjuzet)
<시학>의 여섯 번째 항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사건의 배열’이라 정의한다. 플롯은 그것이 기본으로 삼고 있을 줄거리와는 구별된다. 영화 <박하사탕>의 구조는 플롯과 스토리가 어떻게 다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좋은 예시이다. 영화는 시간상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야 할 김영호의 죽음을 작품 맨 처음에 배치함으로써 작가가 의도한 대로의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이렇듯,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스토리를 작가가 어떤 문학적인 의도로 재배치한 것을 플롯이라고 한다.
스토리와 플롯의 구별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네러티브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플롯만이 문학적이며, 스토리는 단지 작가의 솜씨를 기다리고 있는 재료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플롯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주의 기교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주제로부터 간혹 일탈하기도 하며, 인쇄되어 나오는 판형을 이용한 유희를 벌이기도 하고, 작품의 부분을 바꾸어 놓는가 하면, 쓸데없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을 ‘플롯’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플롯’이란, ‘낯설게 하기’의 연장인 것이다.

4. 기교 대신 기능(function)을 - 지배소(dominant)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상은 변화하고, 사상이 변화함에 따라 문학의 개념 역시 변화해 왔다. 즉, 문학적 기교의 가치와 의미 역시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해 왔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기교’의 개념 대신 ‘기능’의 개념이 등장했다.
동일한 기교라고 하더라도 다른 작품에서는 다른 심미적 기능을 지니고 있거나 혹은 완전히 자동화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하오체’의 말투는 사극에서는 현실감을 나타내지만 인터넷에서는 DCinside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나타날 것이다. rhyme은 시에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이지만 일상생활에서 rhyme을 지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고어적 어법과 같은 어떤 특정한 요소가 ‘소멸’된다면 플롯이나 리듬과 같은 다른 요소들이 그 작품의 시스템에서 지배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로만 야꼽슨(Roman Jacobson)은 이러한 요소를 ‘지배소(dominant)'라고 정의하였다. 지배소는 ‘다른 나머지 요소들을 지배하고 결정하며 변형시키는, 예술 작품의 중심적인 요소’로 정의된다. 지배소는 작품을 작품으로 결정화하는 초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작품의 통일성이나 총체적 질서를 가능하게 해 준다. 지배소의 개념이 등장함으로 인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텍스트에 대한 시각을 ‘기교의 집합’에서 ‘기능적인 시스템’으로 바꾸어 갔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을 영원 불변의 유일한 가치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문학사는 오히려 영원한 혁명의 역사였다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지배소의 개념 역시 이런 역동적인 가치관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사를 설명하는 유용한 방법으로 지배소의 개념을 사용한다. 즉 시적 형식은 제멋대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소의 변화’의 결과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5. 맺으며
러시아 형식주의는 사실 기교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간과한 측면이 많이 있다. 하지만, 기교에 천착함으로 인해 그 동안의 문학비평 이론이 간과했었던 영역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비평 이론이기도 하다.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서 바라보자는 주장은 이전의 작가주의 문학관과는 많이 다른 구조주의적 문학관의 시작이기도 하다.
문학이 ‘낯설다’는 것은 독자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에 빗대어 볼 때 낯설다는 의미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에서는 이전까지의 작가주의 문학관과는 달리 독자의 역할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작품을 해석하는 능동적인 비평가’의 입장으로 격상된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대화를 제시하고, 독자는 끊임없이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관계인 것이다.
by hislove 2005. 5. 6. 04:35